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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라함이 거둔 멋진 승리를 기억합니다. 318명의 가신을 이끌고 4개국 연합군을 격파한 기적 같은 승리 말이지요. 그런데 오늘따라 승리 직후인 15장의 첫머리가 ‘두려워하지 말라’로 시작된다는 점이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상황을 한번 그려보았습니다.
전쟁의 흥분이 가라앉고, 적막한 밤이 찾아왔습니다. 아브라함은 성벽이 있는 든든한 성에 사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들판에 텐트를 치고 사는 유목민일 뿐이었죠.
‘만약 전열을 정비한 그들이 보복하러 돌아오면 어쩌지?’, ‘나는 막아낼 성벽도 없는데...’

대단한 승리 뒤에 찾아온 것은 오히려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의 공포와, 빈손으로 남은 허무함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바로 그, 인간적인 한계에 부딪혀 떨고 있는 타이밍에 하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동문서답 속에 담긴 진심


하나님은 떨고 있는 그에게 “나는 네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라고 위로하십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아브라함의 대답이 참 인간적입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2절)


처음엔 이 대화가 마치 동문서답처럼 느껴졌습니다. 하나님은 방패와 상급을 말씀하시는데, 아브라함은 뜬금없이 자식 타령을 하는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것은 딴소리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가장 처절한 항변이었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방패가 되어 제 목숨을 지켜주신들 무슨 소용입니까? 당신이 엄청난 상급을 주신들 그걸 물려받을 자식이 없는데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지금 투정을 부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가장 아픈 결핍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쏟아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 인생은 여기서 끝’이라는 절망감 앞에서 말이죠.

텐트 밖으로, 그리고 횃불 언약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을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를 좁은 텐트 밖으로 이끌어내어 밤하늘의 뭇 별을 보게 하셨습니다. 내 현실의 천장에 갇혀 있던 시선을 들어, 하나님의 광활한 약속을 보게 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오늘 묵상의 하이라이트는 17절, 그 유명한 ‘횃불 언약’ 장면이었습니다.
고대에는 계약을 맺을 때 짐승을 쪼개 놓고 그 사이를 당사자들이 지나갔다고 합니다. “약속을 어기면 이 짐승처럼 쪼개져 죽으리라”는 무시무시한 생명의 맹세였지요.
그런데 성경은 놀라운 장면을 기록합니다.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아브라함은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상징하는 횃불만이 홀로 그 쪼개진 고기 사이를 지나가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너는 지나갈 필요 없다. 이 약속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진다. 설령 네가 연약하여 넘어지더라도, 내 생명을 걸고 너를 지키고 반드시 이루겠다.”
두려움에 떨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은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목숨을 담보로 한, 찢겨질 수 없는 피의 계약서였습니다.

나가는 글


오늘도 우리는 현실의 두려움 앞에 섭니다. 승리한 것 같다가도 금세 보복이 두렵고, 열심히 산 것 같다가도 내 손에 쥔 것이 없는 것 같아 허무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의 방패다. 그리고 이 약속은 내가 내 생명을 걸고 지킨다.”

내가 쥐고 있는 초라한 현실이 아니라, 나를 위해 기꺼이 쪼개지신 하나님의 그 신실하신 횃불을 바라보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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