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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장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수직적 관계 단절(The Fall)을 다루었다면, 4장은 그 죄의 파장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수평적 관계 파괴로 어떻게 확산되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인 기록입니다.


본문은 단순히 '최초의 살인'이라는 사건 보도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는 인류 문명이 하나님을 떠나 어떻게 스스로를 요새화(Fortification)하는지, 그리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은 어떻게 구속의 역사(Redemptive History)를 이어가시는지를 대조적으로 보여줍니다.


오늘 묵상을 통해 가인의 길과 셋의 길, 그 갈림길에 선 우리의 실존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1. 예배의 본질: '무엇'이 아니라 '누구'인가 (4:1-5)

가인과 아벨의 사건에서 가장 큰 신학적 난제이자 핵심은 "왜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셨는가"입니다.
많은 이들이 제물의 종류(곡식 vs 동물)에 주목하지만, 히브리어 원문과 문맥은 다른 곳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라고 기록합니다. 즉, 하나님이 주목하신 것은 제물(Object) 이전에 제사 드리는 자(Subject), 곧 예배자의 인격과 삶이었습니다.

  • 아벨의 제사: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믿음으로 드렸다(By faith)"고 해석합니다. 그는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드림으로 자신의 삶의 최우선 순위와 가장 귀한 가치를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 가인의 실패: 가인의 문제는 제물의 품목이 아니라, 제사 드리는 마음의 태도와 평소의 행실이 분리된 '형식주의'에 있었습니다.



[묵상 포인트]
나의 예배는 어떠합니까? 나는 예배라는 '형식'을 통해 나의 의무를 다했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나의 헌금이나 봉사 이전에, '나 자신'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삶이 뒷받침되지 않는 예배는 종교적 퍼포먼스일 뿐입니다.


2. 죄의 역동성과 인간의 책임 (4:6-7)


하나님은 분노한 가인에게 경고하십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Sin is crouching at the door)."
여기서 '엎드려 있다(Robetz)'는 맹수가 먹잇감을 덮치기 직전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는 역동적인 단어입니다. 죄는 단순한 실수가 아닙니다. 우리를 삼키려고 기회를 엿보는 인격화된 세력(Power)입니다.
하나님은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는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에게도 여전히 도덕적 책임이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가인은 이 경고를 무시했고, 결국 죄의 지배를 받아 동생을 들로 불러내어 쳐죽이는 참극을 벌입니다.



[묵상 포인트]
내 마음의 문지방을 넘나드는 미움, 시기, 질투를 방치하고 있지 않습니까? 감정의 영역에서 죄를 다스리지 못하면, 그것은 반드시 행동의 영역으로 튀어 나와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죄의 소원은 우리에게 있으나,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그것을 다스려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문명의 화려함과 비참함 (4:16-24)

여호와 앞을 떠난 가인은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며 성을 쌓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을 떠난 가인의 후예들이 인류 문명을 화려하게 발전시켰다는 사실입니다.

  • 야발: 목축업의 조상 (경제적 번영)
  • 유발: 수금과 퉁소 잡는 자의 조상 (문화와 예술)
  • 두발가인: 구리와 쇠로 기구를 만드는 자 (과학 기술과 군사력)

그러나 이 화려한 문명의 정점에는 '라멕'이 있습니다. 그는 최초로 일부다처제를 시행하여 가정의 질서를 파괴했고, 자신에게 작은 상처를 입힌 소년을 죽이고 이를 노래(검가, Sword Song)로 자랑했습니다. 이는 "하나님 없는 문명은 기술적으로는 진보할지 모르나, 도덕적으로는 야만으로 퇴보한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묵상 포인트]
우리는 세상의 성공, 기술, 문화를 부러워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성공은 결국 인간의 폭력성과 교만을 극대화하는 도구가 될 뿐입니다. 내가 쌓고 있는 성(城)은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나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가인의 성입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 (4:25-26)

4장의 마지막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비치는 한 줄기 빛으로 끝납니다.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 하나님은 '셋(Seth)'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셋의 아들 에노스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공적인 예배(Public Worship)가 회복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가인의 후예들이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해 성을 쌓고 칼을 갈 때, 셋의 후예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원형이며 구원 역사의 줄기입니다.


결론: 핏소리와 은혜

창세기 4장은 아벨의 핏소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땅에서 호소하던 아벨의 피는 정의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소개합니다(히 12:24).
아벨의 피는 "복수하라"고 외쳤지만,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는 "저들을 용서하소서"라고 외칩니다.

오늘도 우리는 가인의 길(자기 성취, 힘의 논리)과 셋의 길(예배, 은혜 의존) 사이에 서 있습니다. 우리의 문명이 아무리 화려해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가 없다면 그것은 '놋 땅'의 방황일 뿐입니다.
다시금 예배의 자리로,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기도]
하나님, 우리의 예배가 형식이 아닌 삶이 되게 하소서. 내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죄의 소욕을 성령의 능력으로 다스리게 하시고, 세상의 화려한 성을 쌓기보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거룩한 계보에 서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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